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05학번 국제어문학부 영어 언론 졸업생 김은혜입니다.
저는 지금 한영러 국제회의 통역사로 일하고 있고요.
프리랜서 통역사이다 보니까, 어느 회사에 소속된 건 아니고 매일 매주 다른 곳에서 통역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매일매일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는 기분으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Q. 한동에서 어떤 학생이었는지와 기억나는 에피소드 말씀해주세요.
저는 우즈베키스탄 MK예요. 우즈베키스탄에 살 때는 동네 자체가 매우 작은 동네라서 우리만의 공동체였고 또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도 독일에 있는 국제학교인데 그 국제학교만의 공동체 속에서 계속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매우 작은 제한된 공동체에서 살다가 한동대에 왔더니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예전에는 접해보지 못했던 부류의 사람들도 많이 만나는, 그리고 또 한국 문화에 다시 적응을 하는 그런 시간이었고요. 또 그렇다 보니까 좀 처음에는 싸가지 없다 뭐 이런 이야기까지도 듣고 존댓말과 반말을 언제 써야 되는지 잘 몰라서 좀 오해도 사기도 했던 그런 시간들이었는데 1학년 때는 좀 그렇게 적응하면서 보냈고, 2학년 때는 한동대를 조금 더 이제 한동대의 다양한 기회들을 누리면서 보냈고, 3학년 4학년 때는 공부를 하면서 졸업 후에 하고 싶은 일을 목표를 세워놓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달려갔던 것 같아요.
Q. 한동에서의 시절로 돌아간다면 해보고 싶은 것이나 했던 것 중에서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을까요?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거에만 너무 이제 초점을 맞추고 달려갔던 거 같아요. 그렇다 보니까 그 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기회들을 좀 놓치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이 지금 생각하면 있거든요. 하지만 ‘내가 하기 잘했다’ 싶은 거는 교환학생을 제가 미국으로 갔는데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을 때 동부로 갈지 서부를 갈지 선택을 할 수 있었어요 다양한 학교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동부도 서부도 아닌 그 시골 중부에 갔는데, ‘중부에 가면 진짜 미국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중부까지 갔습니다. 한국 사람들이랑도 안 만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그 미국 시골에 가서 제가 제 남편을 만나서 그래서 졸업 후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교환학생은 꼭 그 중부에 시골 마을로 갈 것 같습니다.
Q. 지금의 직업을 가지기까지의 소명이나 여정은 어땠나요?
제가 선교사 자녀다 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통역을 할 기회들이 많았어요. 어쩌다 보니까 이제 초등학교 5학년 때 막 설교 통역도 하고 새벽기도 통역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통역을 할 기회가 어렸을 때부터 정말 많았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당시에 세계 군인 대회라는게 이제 한국에서 열렸어요. 그때 처음으로 동시통역부스라는 것을 경험을 했고, 그 후에 한동대에 들어와서 통번역 트랙을 들었는데 ‘언어를 이렇게 비교하면서도 공부를 할 수 있구나’라는게 너무 재미있었고 ‘통역이라는 것을 정말 공부로도 할 수 있고 전문적으로도 할 수 있구나’ 그리고 ‘통역사라는 직업도 전문적으로 이제 존재하는구나’라는 거를 한동대 와서 깨닫게 됐어요. 교수님들이 “통역사가 되려면 통번역대학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를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졸업을 하면 통역사가 될 수 있다”라고 하셔서 통번역대학원에 감사하게 입학을 해서 이제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 국제회의 통역사로 졸업을 하게 되어서 이제 통역사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Q. 통역사로서 자신의 삶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저는 항상 소통의 통로가 되자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사실 통역이라는 거 자체가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을 말이 통할 수 있도록, 소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기도 한데, 같은 한국말 하더라도 사람들이 서로 말이 안 통할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 언어적인 차이를 뛰어넘어서 그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포착을 해서 전달할 수 있는 가려움들을 긁어주는 그런 통역사가 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Q. 통역사로 일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 있으신가요?
통역사를 하면 다양한 통역을 하게 돼요.
청와대에서도 통역을 해봤고 방송사에서 하는 생방송 통역도 해봤고, 다양한 정부 기관에서도 통역을 하고, 대기업에서도 통역을 하는데, High-profile, 그러니까 남들이 봤을 때 ‘우와 저런 데서 통역을 했어?’라는 데서 통역을 하고 났을 때 뿌듯하기 보다는 좀 작은 세팅이더라도 제가 통역을 다 끝냈을 때 고객이 “통역사님 안 오셨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아니면 “통역사님 덕분에 너무나 이게 수월하게 회의가 끝났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말씀을 잘 전달해주세요.” 이런 말을 들으면은 그때가 가장 뿌듯합니다. 게다가 이제 어떤 고객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통역사를 고용을 했을 때, 그 고객이 소정의 목표를 달성을 했을 때, 그리고 그 소식을 나중에 저한테 알려 왔을 때 그런 이제 문자를 받거나 전화를 받으면 그때도 너무나도 뿌듯하고 보람을 느끼죠.
Q. 반대로 힘들었던 순간은 어떤 부분이었나요?
제가 프리랜서다 보니까 사람들은 처음에 “프리랜서면 좋겠다.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안 하면 자유롭게 시간도 쓸 수 있지 않나”라는 말을 하는데 프리랜서는 절대로 프리하지가 않습니다. 휴가 기간이 다른 직장인들처럼 정해진 것도 아니고, 오늘 나한테 일이 있다고 해서 내일 일이 있다는게 보장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한마디로 물 들어올 때 열심히 노를 저어야 되는 그런 그런 직종인데 그렇다 보니까 일이 없을 때가 있어요. 몇 년 전에 제가 한 달 가량, 그것도 모든 다른 통역사들이 극성수기일 때 저한테 일이 없었던 적이 있었어요. 이유는 지금도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요. 그게 그 당시에는 ‘내가 통역사로서 소질이 없어서 그런가?’, ‘인정을 못 받아서 그런건가?’, 아니면 ‘내가 저번에 어떤 통역에서 심하게 망쳤었나?’,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밉보였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내가 잘 못해서 그랬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고 정말 바닥을 쳤어요. 너무너무 우울하고, 정말 자괴감이 들고, 혼자서 집에서 막 울고 그랬었는데 그때 저희 신랑이 저한테 그런 마음을 혼자서 생각만 하지 말고 한번 글로 적어보라는 거예요. 제가 사실 평소에 남편 말을 잘 안 듣지만 그때는 들어보기로 하고 정말 적어 봤어요. 이런저런 속상한 마음도 적다가 보니까 이게, 적은게 기도가 되는 거예요. 적다 보니까 제가 이때까지 ‘하나님을 신뢰한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도 하나님,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 그런 거를 어렸을 때부터 들으면서 컸으니까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게 그걸 진짜로 믿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나한테 주시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하고 살았던 거 같은데 그때는 드디어 제가 깨달았던 거죠. ‘아, 하나님이 나한테 일을 주시지 않더라도 그래도 좋으신 하나님이고 그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걸 내가 믿어야 되는구나’ ‘이때까지는 내가 그거를 정말로 믿지 않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구나’라는 거를 그때 깨달았어요. 그때 그래서 많이 울고 회개하고 “하나님, 나에게 주시는 분도 하나님, 안 주시는 분도 하나님, 그리고 그런 하나님도 제가 사랑합니다, 믿습니다” 라는 고백을 그때 하고 나서 그때 이제 회복이 되었어요. 회복이 되고 나서 갑자기 일이 “짠!” 많아진 건 절대 아니지만 적어도 그때 이후로는 제가 조금 더 평정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된 그런 계기가 되었던 것 같고요.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내가 소통의 통로로써 항상 매 순간 최선을 다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Q. 통역가로서 가장 중요한 역량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통역을 하려면 일단 말도 잘 해야 되지만 잘 들어야 되는 것 같아요. 통역사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연사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캐치해서 정리해서 전달하는게 통역사의 역할인데 잘 듣지 않으면 할 수가 없어요. 그냥 기계처럼 받아쓰기 해서 그걸 그냥 언어만 바꿔서 옮기는게 아니고, 의도를 파악을 해서 전달을 하는게 통역사의 역할이고 그렇기 때문에 잘 들어야 됩니다. 또 듣다 보면 분석도 잘 해야 되거든요. 통역을 하다 보면은 사실 말씀을 잘 못하시는 분들을 꽤 많이 만나요. 현업에서는 본인이 하시는 일은 정말 최고의 전문가인데 자신이 하는 일은 말로 전달을 할 때는 좀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그렇다 보니까 처음에 문장을 들었을 때 말씀을 들었을 때 주어, 술어, 목적어를 빨리 파악을 해서 잘 정리를 해야 됩니다. 파악을 하려면 문장을 듣고 잘 분석을 하고 의중이 무엇인지 파악을 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Q. 한동에서의 활동에서 지금의 동문님의 모습에 가장 영향을 준 것은 어떤것인가요?
한동대학교에서는 제가 통역사가 되는 결정적인 그런 시기였던 거 같아요. 왜냐하면 한동대학교에서 통역 수업을 제가 듣지 않았으면 통역사라는 전문적인 그런 직업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을 거고, 교수님들이 뭘 해도 “잘한다 잘한다” 이렇게 해주셔서 제가 통대 진학을 하고 괜히 난 정말 잘하는 거 같고 착각을 가지고 하다 보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좀 더 열심히 했었던 것 같거든요. 그리고 또 한동대학교에서 우리가 매우 귀에 진짜 딱지가 앉을 정도로 너무나도 많이 듣는 “Why Not Change The World?”라는 그 표어가 구호가 어떻게 보면 우리는 너무 많이 들어서 그냥 그러려니 할 수가 있겠지만 한동대를 졸업을 하고 살면서, 일을 하면서 한 번씩 그 집에 있는 한동대 관련된 물건들을 보면서 떠올라요. 그러면 ‘내가 지금 통역사로서 일하면서 정말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나의 통역으로는 내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통역을 하기 전에 항상 기도를 하고 시작을 하는데요, 항상 기도하는 것이 “저의 귀와, 저의 입과, 저의 혀와, 저의 머리를 붙들어 주세요.”, “지켜주세요. 떨리지 않게 해주세요. 잘 정리하고 통역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또 덧붙여서 “나의 통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데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 제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나의 통역이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마음가짐이 저의 한동대의 유산인 것 같습니다.
Q. 삶을 돌아봤을 때 가장 큰 화두가 있을까요?
사실 제가 이렇게 신나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거는 저희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 남편 고마워:) 제가 통역사로서 매우 신나고 재밌게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사실 통역사 외에, 저는 아내이기도 하고 엄마이기도 한데요. 그런데 이제 저희 시간은 한정되어 있잖아요. 저희 아이들이 지금 이제 3학년 4학년을 마쳐서, 이 세상에 태어난지 이제 한 10년 정도 됐어요. 둘 다 이제 10년 더 살면 이제 성인이 되어서 저희 품을 떠날 거잖아요. 그리고 그 10년이, 40대를 살아갈 저로서는 저의 커리어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성장하는데 엄마와의 관계를 잘 구축을 해야 될 텐데, “엄마가 정말 일 열심히 해. 엄마도 인정받는 통역사야” 이런 말을 해주면서 아이들이 뭐 ‘우리 엄마 대단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아이들은 엄마랑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할 텐데, 또 아이들이 앞으로 평생 엄마를 신뢰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엄마한테 말할 수 있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지금 특히 이제 사춘기를 앞둔 시점에서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겠다라는 고민이 있어서 남편에게도 오아시스 같은 아내가 되고 싶은 ‘이러한 것들의 균형을 어떻게 잘 이룰 수 있을까’가 저의 가장 큰 고민입니다.
Q. 꿈을 이뤄갈 한동의 후배들에게 해줄 당부의 말씀이 있을까요?
‘내가 만약에 다시 대학생이 된다면 뭐를 하면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저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다양한 것들을 그냥 마음껏 즐겨보고 느껴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이제 통역사로 일을 하다 보니까 돈은 벌 수 있거든요. 근데 돈은 벌 수 있지만 시간은 내가 벌고 싶어도 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대학생 시절은 비교적 시간을 좀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시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이라는 큰 자산을 가지고 다양한 경험도 해보고,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혀 도전도 해보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대학생 때 하는 실수는 솔직히 용서가 되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이제 이불킥은 좀 하겠지만 그나마 이제 돈 받고 하는 실수보다는 그때 하는 실수는 좀 더 용서가 되는 그런 실수인 것 같아요.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잘 하려고 너무 강박관념을 갖지 말고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을 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Q. 2024년을 바라보며 비전이나 꿈이 있으신가요?
‘내가 만약에 다시 대학생이 된다면 뭐를 하면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저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다양한 것들을 그냥 마음껏 즐겨보고 느껴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이제 통역사로 일을 하다 보니까 돈은 벌 수 있거든요. 근데 돈은 벌 수 있지만 시간은 내가 벌고 싶어도 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대학생 시절은 비교적 시간을 좀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시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이라는 큰 자산을 가지고 다양한 경험도 해보고,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혀 도전도 해보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대학생 때 하는 실수는 솔직히 용서가 되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이제 이불킥은 좀 하겠지만 그나마 이제 돈 받고 하는 실수보다는 그때 하는 실수는 좀 더 용서가 되는 그런 실수인 것 같아요.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잘 하려고 너무 강박관념을 갖지 말고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을 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