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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손톱을 봐라"고 했다. 손톱결마다 시커멓게 착색돼 있었다.
"직접 손으로 암수 꽃가루를 접붙이는 작업을 하다 보니 이렇다. 옥수숫대 맨 위에 달린 꽃들이 수술이고, 가지 중간에 매달린 수염들이 암술이다. 수염에 꽃가루가 떨어져 수정이 되면 수염 하나하나가 옥수수 알맹이다. 다른 옥수수의 꽃가루를 인공적으로 암술에 묻혀 접붙이는 게 이종(異種)교배다. 지금 2만종을 실험하고 있다."
한때 노벨상 후보로 추천됐던 수퍼스타, 정권이 바뀌면서 잊혔던 '옥수수 박사' 김순권(70)씨가 중국 하이난성(海南省) 싼야(三亞)에서 옥수수 육종 연구를 하고 있었다. 싼야는 상하(常夏)의 도시다. 그는 7년째 겨울마다 이곳에서 머문다. 11월 초 옥수수를 심고 이듬해 3월 말 수확한다. 시내 외곽으로 한 시간쯤 달리자 그의 옥수수 농장이 있었다. 그는 갈색 옥수수를 가리켰다.
"리그닌(lignin) 성분이 많아 소가 먹으면 소화를 잘 시킨다. 보통 옥수수는 알맹이 위로 잎이 대여섯개 달리는데 요놈은 열두어개쯤 달린다. 자동차용 대체 연료인 에탄올을 많이 추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운동모를 눌러쓴 채로 그는 중얼중얼거렸는데 잘 알아듣기 어려웠다. 한눈에 봐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논란이 생길 법한 과거 사건을 말할 때도 가리거나 감추는 게 없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나?
"2008년 어떤 분의 초청으로 우연히 왔다가, 겨울에 옥수수 육종 연구 하는데 최적임을 알았다. 내가 이종교배한 최상의 품종을 중국에 심을 수 있게 되면 결국 세계 식량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나."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수퍼 옥수수'로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해주겠다고 떠들썩했는데?
"지금껏 59차례나 방북했다. '수퍼 옥수수'가 특별한 게 아니고 북한 환경에 맞는 옥수수를 말한다. 북한 측과 함께 시험용 옥수수 3000종을 12개 시험장에서 연구했다."
그는 나이지리아에 있는 국제열대농업연구소(ITTA)에서 근무하면서 기생 잡초인 '스트라이가(악마의 풀)'와 공생할 수 있는 옥수수 품종을 개발했다. 아프리카의 기아를 해결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 공로로 다섯 차례나 노벨상 후보에 추천됐다.
그는 아프리카에서의 17년간 연구 생활을 접고 1995년 귀국했다. 북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최고의 스타였다. 국내 저명인사들이 모여 그를 위한 '노벨상추진위원회'를 만들었을 정도다.
―김대중 정권이 바뀌자 소리 소문 없이 매스컴에서 사라졌다.
"내가 물정 모르고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했던 것이다."
―김 박사가 정치를 이용했던 것이 아닌가? 지난 97년 대선 때 '세계적인 옥수수 박사'라는 명성을 내세워 김대중 후보를 자발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나?
"대선 6개월 전 임동원씨(전 국정원장)로부터 '김대중 후보를 도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가 나이지리아에서 대사(大使)로 재직할 때 인연이 있었다. 그 뒤 DJ가 대구에 있는 옥수수 농장을 찾아와 점심을 함께했다. 남북이 분단되고 영호남이 갈라지는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내 한몸을 희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희생이라는 게?
"당시 경상도 사람이 DJ를 지지하는 것은 모든 걸 잃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김대중 후보로부터 방북을 적극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DJ가 그런 약속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를 지지한 것은 정말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 결정이 정말 힘들었다. 국정원의 모 고위 간부가 '김대중은 당선될 사람이 아니다. 선거 끝나면 북한에 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말렸을 정도다."
DJ는 16만표 차이로 당선됐다. 당선자 시절인 1998년 1월 초 그는 북한에 갈 수 있었다.
"방북 나흘을 앞두고 정주영 회장이 만나자고 했다. 집무실에서 나를 가까이 오라고 한 뒤 '북한에 가서 그대로 전해달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첫째, 현대가 금강산 관광을 맡고 싶다. 둘째, 서해에서 석유 시추를 할 수 있게 해달라. 셋째, 내 고향 통천에 사는 숙모의 안부를 알아봐달라. 이게 그대로 잘 이뤄지면 내 재산 10%를 북한에 주겠다고 말해라'는 것이었다."
―방금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역할을 했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미션을 받았다는 뜻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2000년 초 브라질 옥수수국제회의에 참석했는데 국정원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게 해달라'는 말을 꺼냈다. 나 같은 사람이 노벨상을 받는 것보다 김대중·김정일이 받는 게 통일에 더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북측 관계자에게 '이산가족을 만나게 하고 정상회담을 열면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본인의 역할을 과장하는 것이 아닌가?
"정상회담이 구체화되기 전에 내게 '김 박사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으니 국정원장을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임동원 국정원장이 평양에 갔다. 이산가족 상봉도 평양 고려호텔에서 내가 단식하고 밤새도록 눈물 통곡을 하니까, 북한 안내원이 '김 박사 선생의 애절함을 장군님께 보고드렸더니 10일 내로 답을 주신다고 했다. 그러니 기대하시고 서울로 돌아가라'고 했다. 열흘 뒤 '이산가족 만난다' 뉴스가 나왔다. '제주도 남북국방장관 회담(2000년 9월 24일)' 성사는 국정원 부탁을 받고 심부름했다. 내가 평양에서 '국방장관을 내려보내라.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려면 그런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벨평화상을 김정일과 공동 수상하는 걸 염두에 뒀나?
"김정일이 자격이 없더라도 전략적으로 같이 받게 해줬다면 핵(核)문제도 풀리지 않았겠나 싶다. DJ가 수상 소감을 발표할 때 김정일에 대해 언급을 좀 해달라고 모처를 통해 전달했으나 빠져 있었다. 사실 김정일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노벨상을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뒤 평양에 가니 '공동 수상 얘기를 해놓고 박사님이 사기쳤다'고 해 입장이 곤란했다."
―김정일을 직접 만난 적은 있나?
"없다. 순전히 북한을 돕기 위해 아프리카 활동을 그만두고 온 내게 고마워했다고 들었다. 김정일이 '북을 위해 저렇게 헌신하는 남한 사람 김순권 박사를 학습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를 계승한 노무현 정부에서는 활동이 끊겼는데.
"김대중 정부 시절 '비료값'에 사기당한 뒤 2002년 대선에서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그 뒤로 북한에서 초청장이 오지 않았다. 3년 지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정부에서 옥수수 연구비를 안 줘 남북한 연구가 중단됐다. 협동농장 방문에도 과거와 달리 제약이 많았다."
그는 공동주택 2층의 방 한 칸을 얻어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책상과 컴퓨터, 침대밖에 없었다. 곳곳에 흙먼지가 끼어 있었다.
―객지에서 혼자 왜 이렇게 사나?
"내 아들이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인이다. 이 나이에 편하게 쉴 수 있다. 하지만 내 할 일이 여기에 있다."